검사내전[달건이 리뷰]

2019. 12. 17. 16:39카테고리 없음

 

 

 


이제 막 6월이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올해 최고의 책은 이 책이 될 거라는 예감이다.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이 책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전문 작가 못지 않은
아니 오히려 뛰어넘을 만한 유려한 필력이 놀랍다.
자기만의 맛깔스런 필체가 힘차고 생기발랄하다.
검사실에서 겪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들이
때론 흥미진진하게, 때론 숙연하고 통찰력있게 그려진다.
그 강약의 조절과 생동감이 대단하다.
'법'이라고 하면 우선 딱딱함을 떠올리는데
그런 이질감이 전혀 없다.

책의 후반에 가면서 김웅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굉장히 재미있다.
늘 아프고 그래서 외로워 책을 벗삼았던 어린시절을 보자
검사가 되고 나서 거의 체질적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거부감을 느끼고
약자의 편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은 필자의 검사생활이 이해가 갔다.
노숙자와 친구가 되고 대인기피증과 무기력증을 극복한 이야기며
'집요한 또라이'로 불리던 신임검사 시절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다.


마지막 대미는 '내부고발자'라고 해도 좋을 법한
검찰과 국가 권력, 법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수사기관의 힘이 비대해짐에 따라 국민의 삶은 오히려 피폐해지고
본래 국민의 힘이 되살아나 그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대안적이고 근본적인 방안이 마련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페이지도 버릴 것이 없는 책이다.

필자는 서두에서 거대한 여객선의 작은 나사못 이야기를 한다.
존경하는 선배 검사가 자신은 나사못과 같은 존재이며
사실 배가 안전하게 운항하는 것은 그 나사못들 때문이라고 했다는 말.
대한민국에 수많은 비리들이 창궐하여도
이 배가 (신기하게도) 좌초하지 않는 이유는
김웅 검사를 비롯한 수많은 묵묵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콧날이 시큰하다.
감동은 아래 인용으로 덧붙인다.
그냥, 꼭, 한 번 정독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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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여객선의 작은 나사못이라는 것이었다.


나사못의 임무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를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맡은 철판을 꼭 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게 대한민국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벤츠 자동차를 살 때는 삼각별 엠블럼을 보고 사지만
실상 벤츠를 벤츠답게 해주는 것은 수천개의 보이지 않는 나사못들 덕분이라고 했다.
- 프롤로그, '나사못처럼 살아가겠다던 선배를 기억하며' 중에서.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결과 아무리 허술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심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중략)
개미귀신은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개미귀신이 개미에게 뿌려대는 모래는 내 마음속의 탐욕이다.
누구도 자신 안의 탐욕을 이길 수는 없다.
- 사기공화국 중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말했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범죄의 일반이론'은 범죄나 그와 유사한 일탈행위가
모두 자아통제를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아통제 부족'을 모든 범죄의 '일반적인 원인'으로 꼽기 때문에 일반이론이라고 불린다.
자아통제가 낮은 원인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는데,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원인이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 부모나 보호자가 자녀의 행위를 주의 깊게 감독하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해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아통제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은 매우 미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청소년 폭력의 원인은 사회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잘못 양육한 탓이라는 뜻이다.
- <아이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말라> 중에서.

정의를 강제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자연은 인간의 뇌 속에 정의를 침범했을 때 동반되는 처벌에 상당하는 의식,
상응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인류결합의 위대한 보증으로 심어둔 것이며,
이것이 약자를 보호하고 폭력을 누르고 죄를 응징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

사실 의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의지란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대부분은 여러 가지 여건이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연한 행운을 마치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다.
실제로 다산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백성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관각(홍문관, 예문관, 교서관, 규장각)과 대간(사헌부, 사간원)을 없애면 백성이 편안해질 것이다.
관각과 대간을 없애면 임금의 덕이 바로 서고, 모든 관리가 제 할 일을 다 하게 되고,
기강이 바로 잡히고 또 풍속 또한 두터워워질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관료, 재별, 권력기관의 선의만을 바라고 살아야 할까.
그것들이 없어진다고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본질적인 개혁은 버려둔 채 새로운 '목민심서'를 만드는 것으로
오히려 그들의 권력을 더 강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버나드 맨더빌은 말했다.
"나라 전체로서는 정직함에 기댈 것이니라 필연성에 기대야 한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

미국의 법사학자 로렌스 프리드먼은 "사회는 명백히 원하는 범죄의 양을 스스로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범죄의 양이 많아지면 범죄에 둔감해지고 법을 경시하게 된다.
또한 범죄를 지나치게 많이 원하면 검찰이나 수사기관의 힘이 거대해진다.
그 부작용으로 검사들은 엄청난 업무 강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관둬라. 검사 일 하고 싶은 사람 줄을 섰다"라거나 "왕관을 원하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은 하지 마시라.
왕관을 써야 하는 것은 국민이다. 그게 헌법1조가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다.